(장원준 선교사 가정 2014년 1,2월 선교서신)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께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2014년이 시작되나 했더니 벌써 2월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는 레겐스 부르크(Regensburg)는 이번 겨울이 정말 따스한 가운데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정말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지기도 해서 성급한 젊은이들은 벌써부터 반팔과 반바 지를 입고 시내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희 가정이 섬기고 있는 두 곳 교회는 동역자님들의 은혜와 기도로 강건히 잘 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전출을 가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긴 했지만 남겨진 저희들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두 곳 교회의 표어는 “한 알의 죽는 밀알이 되자”입니다. 저희는 많지는 않지만 영적 야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 되어 저희가 심겨진 자리에서 열매 맺는 교회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또 이를 위해 계속 열심히 전도하며 올 한해도 예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먼저 동역자님들의 크신 사랑에 깊은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올리고 싶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27일 저는 독일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열렸던 청소년 수련회에 저희 아이들과 참석 중이었 습니다. 이 수련회는 독일 내에 있는 목회자, 선교사 자녀들과 일반 청소 년들의 신앙과 영성, 영적 건강을 위해 해마다 자비량으로 선교사님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모임입니다. 저희도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가 둘째 날 밤 새벽에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결국 소천하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서둘러 아이들을 깨워 차에 태우고 새벽에 아우토반을 경황 없이 달려서 오전 9시경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여행사 사장님들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편을 부탁드렸습 니다. 하지만 비행기 좌석이 없었습니다. 절망적이었는데 대한항공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직항은 아예 없지만 프랑 스를 들러 가는 비행편이 유일하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다녀올 수 있는 기간은 단 1주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데리고 뮌헨으로 가서 프랑스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간 후 다시 그곳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대한항공에 몸을 싣고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 또 청소년시절의 아버지와의 추억, 또 성년이 된 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희 아버지, 어머니도 자녀들을 키워내시느라 그렇게 희생의 세월을 말없이 보내셨다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2001년 7월 선교사로 파송되어 2006년 안식년 1년을 제외하고 줄곧 부모님 곁을 떠나 있었습니다.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해 드렸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태산 같은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 것을 잘 알지만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따뜻한 ‘진지’ 한 번 제대로 못 대접해 드렸다는 사실이 너무 죄송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지난 8월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화를 받고 저 혼자 부리나케 귀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저를 보시고 많이 우셨습니다. 저는 그 때 2주간의 짧은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에 가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성경을 읽어드릴 때마다 많이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시는 대목에서 특히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라고 제가 여쭙자 아버지는 말씀은 못하시고 힘들 게 팔을 들으시고는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가슴을 가리키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잠드셨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젊은 시절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셨던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를 받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셨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아버지, 이제 빨리 회복하시고 일어나셔야죠?”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체념하신 듯이 눈을 감으시더니 미소를 지으시면서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때부터 하늘나라 가실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가 계시면 저희도 곧 아버지를 따라서 갈 거예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습 니다. 그렇게 2주가 지나 저는 독일로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하고 편했습니다.
‘아버지가 올 겨울은 넘기시겠지…’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2013년을 몇 일 남기지 않고 아버지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2013년 8월의 2주간이 제가 이 땅에서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 2주간의 시간이 제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만 합니다.
한국에 도착하니 12월 28일이었습니다. 몹시 추웠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동생과 매형이 계셨고 여러 지인들 께서도 함께 동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았습니다. 늘 한 결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시던 아버지가 거기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뵐 수 없었지만 언제나 저를 믿어주셨던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마음속으로 올렸습니다. 또 이제는 혼자되셨지만 언제나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는 어머 니께 감사했습니다. 못난 형이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안 직장생활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을 극진히 돌봐 드렸던 사랑하는 동생에게도 한없는 고마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늘 친부모님도 아닌데 친부모님 이상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돌봐주신 사랑하는 매형께도 감사 하고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과 무엇보다도 언제나 은혜로 가족을 돌보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병원 사정상 장례식장은 3일 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주일 아침 저는 아버지의 발인 예배를 직접 집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주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교회들이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버지가 가시는 길은 아들인 제가 전송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더 좋은 곳으로 가신 아버지를 위해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장지로 향했습니다. 아버지는 화장해서 분당의 납골묘에 모셨습니다.
비행시간을 합쳐 고작 1주일 밖에 있을 수 없었던 한국에서의 천금 같은 시간 여러 지인들과의 만남은 할 수 없이 뒤로하고 남은 시간 동안 이미 홀로되신 장모님과 또 아버지를 떠나 보내신 어머니와 함께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선교서신을 통해 늘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신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께 주님의 사랑으로 크신 은혜에 감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머리 숙여 깊이 깊이 감사 올립니다.
계속해서 아래와 같이 기도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장원준•박효진•근용•미연 선교사 가정 기도제목
1.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신실하게 예수님만을 위해 사역하는 가정이 되도록
2. 두 곳 교회(레겐스부르크연합교회와 그라펜뵈어 생명나무교회)의 한인 디스포라들이 세계 선교를 위해 준비되며 올 한해 최선을 다해 전도하도록
3. 장선교사가족의 건강과 근용이와 미연이가 학업으로도 잘 준비 되어 주님 나라 일꾼으로 준비되도록
4. 부족한 차량헌금이 속히 채워지도록
독일에서 항상 동역자님들의 기도와 사랑에 감사 드리는
장원준 선교사 가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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